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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17주 : 남자는 핑크지

임신 17주가 되었다. 순둥이 119일째. 5개월 (17주 0일). 태어나기까지 앞으로 161일.

 

임신 5개월에 접어들었다고 얘기하면, 다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갔냐고 말한다. 임신 2~3개월에 임밍하웃 하였으니, 지인들에게는 두 달의 시간이 지난 것이다. 6월 둘째주부터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한 이후. 105일 정도가 지났다. 

 

지금부터는 태동이 느껴진다는데, 배가 커져서인지 평소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어젯밤에 옆으로 누워잤는데, 반 엎드리다시피 하니 배가 조금 눌렸나보다. 아이가 뱃속에서 꼼지락거리는데 몸통, 팔, 다리를 다 움직이고 있구나 생각이 들어 잠결에도 몸을 바로 했다. 이 엄마 본능. 

 

17주. 최근 이벤트라고 하면. 지난 금요일에 병원 검진에 다녀왔다. 정밀 초음파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남편이 새벽 6시 반부터 달려 오전 9시 반에 집에 도착했다. 지난 두 달동안 혼자 병원에 다녀와서 잔뜩 기대에 부풀었더랬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외래 진료에 보호자 동반이 안 된다고 해서 1층에서 출입이 통제됐다. 

 

3층 외래진료실에 올라가니, 남자가 서너 명은 족히 대기 의자에 앉아있어 화가 불끈 났지만, 자세히 보니 모두 트레이닝복 바지에 편안한 티셔츠, 아니면 병동 보호자라는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산후조리원에서 온 분들이구나. 굉장히 무료하고 심심해 보이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기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만 보고 계시는데, 신발은 모두 슬리퍼. 저 분들은 여기 감금된 것만 같았다. 

 

11시, 20분. 11시 정각에 맞춰갔건만 10시 반부터 기다리는 사람도 아직 진료를 못받있다며 더 대기하란다. 요즘은. 감정기복이 심하다. 남편도 진료실에 못왔는데 기다리기까지 하라니 참을 인을 세 번 그려도 모자란다. 다음 달 같은 요일로 정밀초음파를 잡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배초음파를 하고 있으니, 아기 몸통이 보였다. 아기는 태반을 베개삼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모양이었는데 너무 귀여웠다. 선생님께서 꼼꼼하게 머리 둘레, 배둘레, 수정체, 위, 발가락 다섯개, 손가락 다섯개, 발바닥, 손바닥, 등뼈를 차례로 확인시켜 주셨다.  머리가 앞뒤로 갸름한 것이 남편을 닮았다. 그렇게 초음파를 보고 있는데, 아들인 것 같은 모양새가 다리 사이로 보였다. 뎅....

 

"아빠를 닮았네요."

"아빠를 닮았으면 남자인가요?"

"아빠를 닮았으면 그렇겠죠."

 

절대 성별을 직접적으로 알려준 것은 아니다. 꼬막이와 나는 여동생을 바라고 있어서, 그때부터 감정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자매가 얼마나 좋은지 크면서 느끼고 있어서 우리 꼬막이도 자매가 있었으면 했는데, 꼬막이 옷을 아직 하나도 버리지 않았는데. 으앙.. 넘 아깝다 ㅠ 

 

나와서 남편을 찾았다. 전화를 했다. 아직 알려주지 않았다. 문으로 걸어들어온 남편에게 말했다.

 

"남자애래."

 

왠지 아들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남자애라는 표현이 중립적으로 느껴져 그렇게 말했다. 남편은 같이 목욕탕에 갈 아들을 바라고 있어서 (하지만 내가 스트레스 받을까봐 절대 표현하지 않고) 정말 좋아했다. 저녁에 부모님께 성별을 알려드리자 했지만, 내려오는 사이에 엄마가 생각나 전화드렸다.

 

"거봐, 내가 아들일거라고 했지? 딸이면 그렇게 입덧이 없을 수 없다니까."

 

입덧 심해서 외부 음식은 잘 못먹고 매일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것만 만들어먹는데, 매일 아침마다 양치하다가 토하는데... 안 보이시니 힘든지 아닌지 알 수가 없겠지 ㅠ.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남편에게 전화드린 사실을 말했다.

 

"이따 저녁에 얘기하자며?"

 

남편은 입이 귀에 걸렸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 내친 김에

 

"엄마, 아들이래. 엄마....? 울어?"

 

어머님이 연신 고맙다며 울먹거리셨다. 근데, 나도 방금 전에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나서. 

 

요즘들어 꼬막이랑 노는 게 정말 즐거워 진짜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더랬다. 한 명 더 있어도 좋을 듯 싶었는데, 아쉽다.

 

"하나 더 낳을까?"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말했다. 물론 빈말이었다.

 

"정말?"

"아니, 농담이야."

 

나름 빨리 사실을 받아들였다. 집에 오자마자 몇 년간 보관해온 80,90 사이즈 옷을 정리해 상자에 싸두었다. 박스는

다음날 꼬막이 사촌여동생에게 보냈다. 그리고 꼬막이가 입었지만, 남자애도 충분히 입을만한 작은 옷, 언니가 준 남자애 옷을 차곡 차곡 정리해 한 박스 반을 만들었다. 예쁜 옷을 또 못입히는게, 엄마가 철마다 사다준 원피스가 너무나 아깝다. 

 

"남편, 남자애 핑크 입혀도 될까?"

"그럼, 애가 뭘 알아. 남자는 핑크지."

 

이렇게 17주가 가고 있다.